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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입 막는 ‘블랙리스트’ 실존…문화계 “정치검열 규탄”

학운 2016. 10. 13. 07:46

ㆍ세월호 시국선언한 문인 등 9473명 명단 정부 기관 활용
ㆍ지원 사업 선정 때 ‘솎아내기’

ㆍ“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요구
“예술 검열 반대” 지난해 11월 각 분야 문화예술인 60여명이 서울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 모여 ‘예술검열 반대와 문화민주주의를 지키는 문화예술인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적 검열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동안 무성한 소문을 낳던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실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가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의 창작지원 배제 등 정치적 검열을 위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정부 부처에 내려보냈고, 문화정책 집행 현장에서 이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 블랙리스트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 시국선언을 한 문인 등 문화예술인 총 9473명이 올라 있다.

문화예술계는 12일 “시대착오적인 정치검열로 문화예술의 자유를 빼앗고 문화예술을 정권에 종속시키려는 박근혜 정부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나고 있다”며 명확한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개최, 관련자들의 처벌 등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문화계의 한 인사는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이 지난해 5월 블랙리스트가 청와대에서 내려왔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한 얘기를 들었다. 실제 문건을 보기도 했다”고 한국일보에 밝혔다.

문체부 전직 고위 관계자는 이날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시국선언 등에 참여한 예술인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청와대에서 지시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9473명이 적힌 이 블랙리스트 문건은 A4용지로 100장이 넘는다. 블랙리스트의 예술인들은 구체적으로, 지난해 5월 있었던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문화예술인 594명, 2014년 6월 있었던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 1608명 등 모두 9473명이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은 국감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회의록을 근거로 청와대가 정치검열을 위한 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며 문화예술계에선 그동안 검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서 심사기준 1위 작품의 탈락 사태, 선정된 공연 작품의 지원금 포기 종용 사건 등이 잇달으며 정부의 검열을 비판하는 토론회, 시위 등이 벌어졌다.

문화연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한국작가회의, 서울연극협회 등 문화예술계는 이날 현 정부의 정치검열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강력 대응키로 했다.

문화연대는 성명을 통해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검열 수준이 예술가 길들이기 정도가 아니라 눈밖에 난 예술가들을 낙인찍고 이들이 공공의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차단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를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문화연대는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개최 등을 요구했다. 민예총은 성명서에서 “통제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고사시키려 한다”며 “이는 예술가만의 문제를 넘어 국민의 자존과 국격을 정권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원식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문학과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핵심인데, 블랙리스트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지적했다. 송형종 서울연극협회장은 “청와대를 컨트롤타워로 하는 폐쇄적인 정부가 문화예술을 농단하고 있다”며 “향후 투쟁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익명을 요청한 한 미술평론가는 “(정부 부처나 기관에서) 블랙리스트를 사용(전달)할 때도 일종의 매뉴얼이 있는데, 전자파일 등 기록이 남지 않게 하고 누군가 문서를 보면 즉시 파기하는 식”이라며 “비판 의견을 차단하고 끊어내는 폭압적인 상황”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