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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 좀 깎아 주세요” 툭하면 정식재판 청구에 법원 골머리

학운 2016. 4. 18. 16:27
‘불이익변경제도’를 악용한 사례가 급증하고 있어 법원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불이익변경제도는 약식명령을 받은 피고인이 정식재판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약식명령보다 무거운 형을 내리지 못하도록 규정한 제도다. 국민이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했지만 최근들어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사법부 업무 과중을 부추기고 있어 개선책 마련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통상 검사는 가벼운 죄를 저지른 피고인에 대해서는 정식기소를 하지 않고 약식기소를 한다. 법원은 정식 재판을 열지 않고 서류상 심리를 거쳐 판결을 확정한다. 유죄 판결시에는 통상 벌금형이 내려진다. 벌금부과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피고는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불이익변경제도가 적용되는 게 바로 이 시점이다. 법원은 약식명령 때 내려진 벌금형 이상의 형을 부과하지 못한다. 피고인으로서는 정식 재판에서 패소해도 본전인 셈이다.

◇‘밑져봐야 본전’…벌금 줄이려 정식재판 청구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이 도입된 1997년만 해도 ‘약식명령→정식재판’ 비율이 전체 83만851건 중 1.8%(1만4969건)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전체 68만2564건 중 11.5%(7만8472건)나 됐다.

가장 큰 문제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벌금을 줄일 목적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재판중에는 형 집행이 정지되는 점을 악용해 벌금 납부나 영업정지 기간을 늦추기 위해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재경법원의 부장판사는 “오로지 벌금을 줄일 생각에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사건이 많다”며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벌금을 깎아달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때마다 벌금액을 두고 피고인과 흥정을 벌이는 시장 상인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법정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하고도 피고인이 재판에 나오지 않아 법원이 피고인 출석을 요구하며 신문이나 관보에 재판일정을 공시하는 ‘공시송달’ 사건이 2010년 이후 매년 전체의 15%를 넘어서고 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정식재판을 청구하고도 재판에 나오지 않는 것은 재판을 끌어 벌금형 선고를 늦추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불이익변경제도를 이용해 구청에서 받은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을 미루려는 꼼수도 등장한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가 적발될 경우 구청에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검찰에서 약식명령을 통해 벌금을 부과한다. 이때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이 두가지 처분을 모두 미룰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당장 가게 문을 닫지 않을 속셈으로 유죄 확정 전까지는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이 지연되는 점을 노린 정식재판 청구사건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2018년 벌금에도 집행유예제도 도입…악용사례 더 늘 듯

문제는 2018년 이후 이런 악용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2018년부터는 5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대상으로 집행유예제도가 시행된다. 법원은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인정되는데 이보다 가벼운 형벌인 벌금형에는 인정되지 않아 합리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고, 벌금 납부능력이 없는 피고인이 징역형의 집행유예 판결을 원하는 경우가 많은 등 형벌의 부조화 현상을 감안해 벌금형에도 집행유예제도를 도입했다. 다만 고액의 벌금형까지 집행유예를 인정하는 데 따른 비판적인 법감정을 고려해 벌금형의 상한을 500만원으로 정했다.

법조계에서는 약식기소로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 판결을 노리고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사례가 급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2014년 기준 전체 약식명령 사건 중 벌금 500만원 이하 사건이 97%인 점을 고려하면 정식재판 청구 홍수가 예상된다”며 “무거운 사건에 더 집중해야 할 사법 자원을 가벼운 사건에 투입하는 것은 효율성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문제”라고 말했다.

사법부에서는 제도의 오남용을 줄이기 위해 △벌금 분납 및 납부 연기 선고 △영업범 사건 정식기소 △형사소송비용 부담 △외국에서 시행하는 유죄협상(plea bargain) 도입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없애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정식재판을 청구했다가 벌금액이 많아지거나 징역형 등 실형을 선고 받는 경우가 발생하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를 근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은 우리의 ‘약식명령→정식재판’과 유사한 절차에서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이 제도 폐지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제도 폐지가 자칫 국민이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서다.

17대와 18대 국회에서는 불이익변경제도 폐지를 위해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결국 국민이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결됐다. 19대 국회에도 같은내용의 개정안이 상정됐으나 이미 통과는 물건너간 상태다.

손종학 충남대 로스쿨 원장은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없애는 것은 사건 처리 부담을 줄이려는 사법 행정적인 발상”이라며 “정식재판을 청구하려는 피고인의 심리가 위축될 우려가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