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채권채무·손배소송

"수갑 찬 피의자 촬영 허용 위법" 국가배상책임 첫 인정

학운 2019. 7. 9. 07:24

수갑을 찬 피의자를 언론사가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경찰의 관행에 대해 법원이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수사기관의 피의자 촬영 허용 관행에 대해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된 건 최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데 이어 사법부에서도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셈이어서 피의자 단계에서의 언론 취재관행에 변화가 예상된다.

다만 법원은 경찰의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서는 "피의자들의 명예가 훼손된 것은 맞지만, 일부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된 점 등을 감안하면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단해 책임을 제한했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판사 강하영)은 A, B씨가 정부를 상대로 낸 국가배상소송에서 '대한민국이 B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최근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앞서 지난 2012년 형제 사이인 A씨와 B씨는 서울강동경찰서에서 보험사기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B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기자실에 '교통사고 위장, 보험금 노린 형제 보험사기범 검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어 기자들의 취재 요청에 응해 B씨가 서울 강동경찰서 조사실에서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조사받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형제는 TV방송사 등 언론에 얼굴이 노출되자 인격권이 침해됐다며 경찰의 행위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지난 2014년 헌법재판소는 "이들이 공인이 아니며 보험사기로 체포된 피의자에 불과하므로 신원공개가 허용되는 예외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수갑을 차고 조사를 받는 모습을 촬영하도록 허용할 공익목적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촬영행위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TV방송 과정에서 A씨의 얼굴이 흐릿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돼 송출됐지만 경찰관이 언론취재 과정에서 A씨의 얼굴을 공개한 행위를 해 침해 최소화를 위한 특별한 조치도 없었다. 피의자의 얼굴이 공개돼 인격권의 중대한 제한을 받았고, 범인이라는 낙인효과까지 남게 돼 매우 가혹한 침해를 입게 됐다"며 "경찰의 조사과정 촬영 허용 행위는 인격권 침해"라고 봤다.

이후 A씨는 2016년 최종 무죄 판결이 확정됐고, B씨에 대해선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됐다. 형제는 지난 2017년 서울중앙지법에 정부를 상대로 "서울강동경찰서 경찰관들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경찰이 △보도자료 배포 등 피의사실 공표 및 B씨에 대한 촬영을 허용한 점 △B씨 실명 등 인적사항을 공개한 점 △형제가 공모한 사실이 없음에도 공모한 것처럼 특정하고, 피해액수와 피해건수를 부풀리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한 점 △참고인조사에 불응하자 피의자 소환절차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구금한 점 등의 불법행위로 인격권과 초상권 등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둘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주장했다.

현행 형법 제126조는 수사기관에서 피의사실을 공표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당시 경찰관 직무규칙 제83조는 원칙적으로 수사사건에 대해서는 공판 전에 언론에 공개할 수 없도록 하면서 중요범인이나 유사범죄 예방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법원은 경찰이 직무규칙을 위반해 피의자를 언론에 노출시킨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은 경찰청 훈령이지만 국민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경찰 활동 과정에서 지켜야 할 직무기준을 정한 것으로, 상대방의 인권보호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라면 그런 직무규칙을 위반해 이뤄진 경찰의 행위는 위법"이라며 "피의자를 특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수사기관 내에서의 촬영은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될 수 있고, B씨는 보험사기를 이유로 체포된 피의자에 불과해 신상에 관한 정보공개가 허용되는 예외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봤다.

법원은 이어 "촬영을 허용하더라도 얼굴공개가 가져올 피해 심각성을 고려해 모자, 마스크 등으로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경찰은 이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B씨가 조사실에서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조사받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게 허용했다"며 "일부 언론에선 조사실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실명까지 나타나게 해 B씨의 초상권 및 인격권이 침해됐으므로, 국가가 1000만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A씨에 대해서는 직접 촬영대상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판단한 '촬영행위' 외에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법원은 보도자료 배포로 인한 피의사실 공표행위에 대해 형제가 피해를 입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경찰의 행위에 위법성이 없어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고 봤다.

법원은 우선 "강동경찰서 경찰관이 기소 전 보도자료를 배포해 언론에 원고 나이 가족관계 피의사실 등이 보도됐고 원고에 대한 무죄판결이 확정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아 보도자료 배포로 원고들에 대한 피의사실이 공표된 점, 그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봤다.

법원은 그러나 "보도자료엔 원고 범죄혐의 표현이 다소 단정적으로 표현돼 있으나 경찰 수사단계에서의 발표에 불과하고 일반인 관점에서도 최종 판단은 재판결과에 따라 확정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점, 원고 성과 나이만 밝혀 익명의 형식을 취한 점, 피의사실 발표 권한자가 공식 절차를 거쳐 배포한 점, 원고에 대한 무죄판결 이유에서 고의 교통사고 유발의 의심이 든다고 판단한 점, 형제 B씨에 대해 유죄판결이 확정된 점을 고려하면 피의사실 공표행위는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아울러 원고가 주장한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배상청구 역시 기각했다. 법원은 "보도자료엔 원고들이 공범으로 기소되지 않았음에도 '총 98회, 3억 원 상당 보험금을 편취한 형제 보험사기범 검거'라고 기재돼 피해액수와 피해건수가 기소된 범죄사실보다 과다한 점이 인정된다"면서도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돼 세부에 있어 진실과 약간 차이가 있거나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더라도 (경찰이)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