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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사건, 시그널을 찾아라]①우물 깊이 60㎝에서 숨진 여교사

학운 2016. 3. 17. 19:39

①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 사건

꼭 10년 전에 발생했다.

2006년 3월 14일 아늑한 농촌인 강원 동해시 망상동 심곡약천마을의 평온은 일순간에 깨졌다. 100여가구 270여명의 주민들이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마을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좋은 샘물이 많아 유명세를 타던 이곳엔 나들이객 대신 강력사건 형사들이 찾았다. 이날 오전 심곡 약천마을 한 가운데 있는 우물 안에서 2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마을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 선생이 머물면서 서당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 썼던 곳이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란 시조도 남구만 선생이 자신의 호와 이름이 같은 ‘약천(藥泉)’ 마을에서 지은 것이다. 당시 주민들은 “남구만 선생의 사당이 있는 유서깊은 마을에서 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물 속 사체 발견 소식은 인근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이후 약천마을 뿐 아니라 동해시의 도심 분위기도 싸늘하게 가라 앉았다.

■ 우물 깊이 60㎝에서 여교사 숨진채

10년전 약천마을 통장을 맡고 있던 최성혁씨(64)는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우물안에 시신이 있다’는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처음엔 농담인줄 알았으나 산불 감시원으로 일하는 동네 노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심각성을 느낀 최씨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우물속에 엎드린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알몸 사체를 확인한 최씨는 지체없이 경찰에 신고했다. 우물 속 사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마을 한 주민의 친척 ㄱ씨(당시 40대)였다.

최씨는 “봄철 영농준비를 위한 퇴비 살포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약천마을을 찾았던 ㄱ씨가 이날 오전 일을 하던중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에 갔다가 사체를 발견해 주민들에게 알렸다”고 말했다.

최씨는 “ㄱ씨가 평소 잘 흐르던 우물의 물이 졸졸 조금씩 나오자 이물질이 입구를 막은 것으로 생각해 우물 뚜껑을 열었다가 사체를 발견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덧붙였다.

의문의 여인 사체가 발견된 우물의 깊이는 60여㎝에 불과해 사람이 빠져 숨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감식작업을 통해 숨진 여인이 동해시에 거주하던 학습지 여교사 ㄴ씨(당시 24세)란 사실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ㄴ씨는 6일전인 같은 해 3월8일 오후 9시40분쯤 실종 신고된 상태였다. 키 150㎝ 가량의 작은 체구인 ㄴ씨는 당시 동해시 부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 방문 교육을 마친 뒤 귀가하던 중 연락이 끊긴 것으로 확인됐다.

부검결과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로 판명됐다. 목이 졸려 살해된 뒤 시신이 약천마을 우물 속에 유기된 것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동해시 시가지. │동해시 제공

상공에서 바라본 동해시 시가지. │동해시 제공

■ 범인은 “마을지리 잘아는 사람”

ㄴ씨는 가정 방문 교육을 마친후 실종되기 직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마지막 수업을 한 가정에서 대접받은 음식물이 숨진 ㄴ씨의 위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 사망추정 시간을 말해준다.

개인별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보통 위에서 음식물이 소화되는 시간은 5~6시간 정도다. ㄴ씨의 실종전 행적 추적에 집중하던 경찰은 이튿날 오후 동해체육관 앞 주차장의 수돗가에서 마티즈 승용차 한대를 발견했다. 바로 숨진 ㄴ씨가 실종 당일까지 타고 다닌 것이었다.

차 안에선 ㄴ씨의 옷과 일부 소지품도 나왔다. 또 뒤진 흔적이 있고, ㄴ씨가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 몇점은 없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급진전 될 것 같았던 수사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범인이 수돗가에 차를 세우고 걸레로 내·외부를 모두 닦아 감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문이나 DNA를 추출할 수 있는 머리카락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량이 발견된 곳은 시신 유기 장소인 심곡 약천마을 우물에서 남쪽 방면으로 7∼8㎞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경찰은 우물과 종합운동장의 중간 지점인 동해시 부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방문 교육을 마치고 나와 자신의 차량에 타려던 ㄴ씨를 범인이 납치해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형사는 “음부 주변에 경미한 손상 흔적이 있기는 했으나 정액이나 체액등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성폭행을 하려다가 반항하자 미수에 그치고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범인이 ㄴ씨의 차량을 이용해 북쪽으로 4㎞ 가량 이동해 시신을 우물에 유기하고,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다시 차를 몰고 남쪽으로 7∼8㎞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제의 차량이 약천마을 우물 인근 도로를 지나는 장면은 이 마을의 산불감시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상착의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심곡 약천마을 정보화위원장인 최승용씨(59)는 “약천마을에 뚜껑이 있는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담하게 시신을 유기한 것을 보면 범인이 이 지역 지리에 밝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숨진 ㄴ씨의 주변 인물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좀처럼 범인의 윤곽을 찾지 못했다. 10년전만 하더라도 차량용 블랙박스가 보편화되지 않았고, 방범용 CCTV도 부족해 차량을 버리고 사라진 범인의 행적을 포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미궁에 빠진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지는듯 했다.

동해시 지도.

동해시 지도.

■ 동일범 의심되는 미수사건 잇따라

한동안 잠잠했던 동해지역에선 3개월 후 2건의 부녀자 납치 미수 사건이 잇따랐다. 2006년 6월1일 밤 동해시 부곡동 한 아파트 인근에서 자신의 차량에 타려던 40대 부녀자는 갑자기 나타난 괴한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후 납치됐다.

범인은 이 부녀자를 성폭행하려다가 반항하자 미수에 그친후 목을 졸랐다. 이후 발버둥 치던 피해자가 의식을 잃자 도로변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 부녀자가 버려진 장소는 3개월전 학습지 여교사가 숨진 채 발견된 약천마을 우물 방면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극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살아난 이 부녀자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던 당시 상황을 경찰에 진술하며 몸서리쳐야 했다.

1차 납치 미수사건이 발생한지 3주후인 같은해 6월 23일. 동해시 부곡동의 다른 아파트 앞에서 또다시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 피해자 역시 40대 부녀자였다. 범인은 차량에서 내리던 부녀자를 차량안으로 밀치며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며 완강하게 저항하자 바로 인근 골목으로 달아났다. 당시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군인은 ‘사람 살려’란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가 범인을 쫓았지만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연이어 부녀자 납치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동해시 일대엔 확인되지 않은 괴담까지 퍼지면서 주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3개월전 발생한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도 자연스럽게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강원지방경찰청 청사 전경.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강원지방경찰청 청사 전경.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연쇄 납치 미수 사건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3개월 전 발생한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과 연관성이 많아 보였다. 3건의 사건은 모두 동해시 부곡동의 아파트 단지 반경 150m 이내에서 발생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오후 9시를 전후한 늦은 저녁 시간대, 아파트 인근에서 홀로 차량에 타거나, 내리려던 여성을 공격한 점도 공통점이다. 작은 체구의 여성을 골라 범행 대생으로 삼은 점도 모두 같았다.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 폭행 등 완력으로 힘 없는 여성을 제압하려한 범행수법도 닮아 있었다. 1차 납치미수 사건 발생시 탈취한 피해자 차량을 몰고 간 범인의 이동 경로도 앞선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같은 정황은 3건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납치 미수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한 형사는 “파장을 우려해 연쇄 범죄란 언급을 삼갔으나 직감적으로 동일범의 소행이란 생각이 들었었다”며 “이때부터 사건 개요와 특징을 노트에 메모해 항상 들고 다녔다”고 말했다. 외부엔 별도의 사건을 수사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내부적으론 연관성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강원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안내판.

강원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안내판.

■ 유일한 흔적은 머리카락 한 올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과 2건의 납치 미수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가정하면 사건을 추적할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범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6년 6월 23일 동해시 부곡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발생한 2차 부녀자 납치미수 사건 당시 범인은 피해자를 차량 안으로 밀어 공격했고, 이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은 사건 발생직후 감식을 통해 차량안 룸미러에서 모발 1개를 채취해 DNA를 확보했다. 문제의 DNA는 가족이나 이 차량에 탑승했던 지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몸싸움 과정에서 범인의 머리가 룸미러에 부딪치면서 빠진 모발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후 경찰은 지역에 거주하는 우범자 및 체포된 강력 범죄자,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과 관련해 용의 선상에 올랐던 피해자 주변 인물 등을 대상으로 DNA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일치되는 사례를 찾지 못했다. 이후 수사에 진척이 없는 데다 추가 유사 범죄도 발생하지 않으면서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 사건’은 장기 미제로 남았다.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 관계자가 사건 서류를 살피고 있다.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 관계자가 사건 서류를 살피고 있다.

■ “응원하며 기다려 달라”

현재 이 사건은 강원지방경찰청 강력계 미제사건 전담팀으로 넘겨져 재수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7월24일 종전 25년으로 돼 있던 살인죄의 공소 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형사소송법 개정안(일명 태완이법)이 통과된데 따른 후속 조치로 5년이 넘은 살인사건은 지방경찰청의 미제사건 전담팀이 담당하고 있다.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에 대한 재수사 전망을 알아보기 위해 접촉한 한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는 신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당부부터 먼저 했다. 위계질서가 그 어느 곳보다 강한 조직문화 속에서 특정 사건을 담당했던 동료들의 수사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탓이다.

그는 “학습지 여교사 피살 사건을 포함해 동해시에서 발생한 3건의 사건은 모두 부녀자를 납치해 성폭행을 시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며 “10년째 유사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범인이 근거지를 타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직후 이사를 가거나 진학 및 군입대 등으로 인해 주거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보강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파일러는 “반사회적인 흉악범죄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소시오패스 또는 성폭행범들은 보통 범행욕구를 참지 못해 추가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의 범인을 하루 빨리 검거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은 사건별 파일을 만들고 수사 관련 서류를 꼼꼼하게 다시 살피고 있다. 수사상 미비점을 찾아내 보완하기 위해서다. 미제사건 전담팀 관계자는 “미제사건의 경우 현재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안인 만큼 진척사항 등을 밝힐 수 없다”며 “팀원들이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사건을 분석하고 있으니 결과물을 내 놓을때 까지 응원하며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 사건’ 관련 제보는 (033)241-4599, 252-4599로 하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