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형사판결

반찬에 침 뱉어도, 차 가로막아도..재물손괴의 재발견

학운 2021. 7. 5. 09:04

굴착기 기사 배모씨는 지난 5월 대법원에서 재물 손괴죄로 벌금 50만원이 확정됐다. 물건을 부수거나 망가뜨린 것은 아니었다. 주차된 차를 가로 막았다가 벌금형이 선고됐다.

 

그는 2018년 7월 평소 자신이 굴착기를 주차하던 한 공터에 다른 승용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가 난 배씨는 그 차 앞뒤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과 굴착기 부품을 1m 넘는 높이로 쌓아놨다. 차가 파손되거나 흠집이 생기진 않았지만 이 차는 공터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검찰은 배씨에 대한 처벌을 고심하다 재물 손괴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1심은 “차의 형상·구조·기능에 장애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구조물 때문에 일시적으로 차량 본래의 효용을 해했다”며 재물 손괴 혐의로 벌금 50만원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형을 확정했다.

 

최근 재물 손괴 혐의를 폭넓게 해석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형법상 재물 손괴죄의 ‘재물’은 동산·부동산부터 반려견까지 폭넓게 인정된다. 또 그 재물을 전혀 훼손하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방해했다면 ‘재물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으로 보고 유죄 선고를 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전체 형사공판(1심 기준) 피의자 수는 2014년 26만8823명에서 2019년 24만7063명으로 줄었으나 ‘손괴의 죄’로 형사공판에 넘겨진 피의자 수는 같은 기간 2887명에서 3335명으로 448명 늘었다.

 

변호사 정모(47)씨는 지난해 4월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아내가 통화를 하며 식사하자 “야 미친X아, 밥 X먹으면서 전화 통화하냐”고 욕하면서 반찬과 찌개에 침을 뱉었다. 아내는 남편 정씨를 고소했다. 그는 재물 손괴죄로 법원에 넘겨졌다. 서울서부지법은 정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침을 뱉어 (아내 소유) 음식의 효용(가치)을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법원의 재물 손괴 인정 폭이 넓어지다 보니, 수사기관에선 재물 손괴죄를 ‘만능 열쇠’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육체 접촉이 없어 성범죄로 처벌하기 어려운 사건에서도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이 혐의를 적용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7급 공무원 박모(48)씨는 지난해 1월부터 6 차례에 걸쳐 동료 여성 공무원 B씨가 책상에 놓아둔 텀블러를 화장실로 가져가 자신의 정액을 넣었다가 발각됐다. 검찰은 박씨의 이런 행동이 텀블러의 효용을 떨어뜨렸다고 보고 재물 손괴죄로 그를 기소했고, 법원(1심)도 지난달 유죄를 선고했다.

 

회사원 C(33)씨는 지난해 6월 울산 중구의 한 PC방에서 20대, 50대 여성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이 마시던 커피에 자기 소변을 몰래 넣었다가 ‘커피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며 재물 손괴죄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를 선고받았다. 서혜진 변호사는 “실제 신체 접촉이 없어 성범죄 처벌은 어렵기 때문에 적용 범위가 넓은 재물 손괴죄를 적용한 것”이라고 했다.